'맬겁시(詩) 왔당께'..문학청년 꿈꾸는 실버들의 공부방

등록일자 2024-03-16 09:00:01
'시인 문병란의 집', 주민 대상 시 창작 교실 운영
회원 대부분 60~80대 "설렘과 감성 충만해져"
인생의 질곡과 회한, 추억과 소망 한 줄 시에 응축
▲'맬겁시(詩) 왔당께' 회원들이 모여 합평회를 갖는 모습. 사진 : 시인 문병란의 집

광주광역시 동구 지산동 무등산 자락에 자리한 '시인 문병란의 집'에는 매주 수요일 오전이면 동네 어르신들이 하나, 둘 모여듭니다.

가장 연세가 많은 83살 이향연 할머니, 해외 선교사 출신 78살 강영수 할아버지, 동네 마트 주인 61살 고광순 씨 등 7명의 주민들이 환한 얼굴로 서너평 남짓 방안을 가득 채웁니다.

◇ 광주 동구 '인문 동아리' 지원 프로그램

이들은 시 창작 동아리 '맬겁시(詩) 왔당께' 회원들로, 이날은 각자 써온 시를 발표하고 서로 품평하는 시간입니다.

지난 2021년 문을 연 '시인 문병란의 집'은 인문도시 동구의 문화거점 공간으로서 광주시민과 동구 주민들이 함께 하는 시 창작 동아리 '맬겁시 왔당께'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큐레이터인 시인 62살 박노식 씨가 동아리 선생님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그는 전임자에 이어 지난해 9월부터 이 시 창작반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5명 회원의 시 49편이 담겨 있는 두 번째 작품집 표지

매주 시를 써오도록 주제를 내주고, 써온 글을 한 줄 한 줄 다듬어 주기도 합니다.

회원들은 손주가 사준 줄공책에 검정 사인펜으로 서너 장 빼곡히 시를 써오거나, 지난 한 주 동안 사색의 흔적이 가득한 젊은 날의 연애시를 써서 닳고 닳은 USB에 저장해서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써 놓은 지 며칠 지난 시를 주머니나 손가방에 넣어두고 잊어버린 채 지내다가, 아침에 불쑥 꺼내어 보여주면 구겨진 종이 속에 숨어 있던 시가 생명을 얻기도 합니다.

이렇게 모아진 시들은 연말이면 예쁜 한 권의 시집으로 만들어져 이웃들에게 전해집니다.

2022년 첫 문집 '솔찬히 고생했당께'에 이어 지난해 두 번째로 만든 작품집은 '고상혀도 마음은 보름달이랑께'.

여기에는 강영수, 노진양, 이향연, 주미례, 고광순 씨 등 5명 회원의 시 49편이 담겨 있습니다.

이향연 할머니는 "나이 먹어서 몸은 불편해도 글이란 걸 쓰고 보니 참 재미있다"며 "쓸 때는 고생혀도 쓰는 동안 만큼은 옛날이고 지금이고 생각하는 시간이 나를 지켜주니 보람이 있다"고 소감을 전했습니다.

노진양 씨는 "시 창작 공부를 하며 심장이 새롭게 뛰는 듯한 설렘과 더불어 감성이 충만해짐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 "신산한 삶의 이면을 발견, 콧등이 시큰"

일부는 습작 수준의 작품도 있지만, 기성 시인 못지 않은 완성도 높은 작품도 적지 않습니다.

대부분 인생의 질곡과 회한, 그리고 소망이 응축되어 읽는 이로 하여금 잔잔한 감동을 느끼게 합니다.

화순 앵남 간이역쯤이었을까?
내가 앉아 있던 자리

열차 하나 당도하고
깃발 같은 것 하나 흔들리고
길 다란 검은 실루엣 하나 서슴서슴 지워져 갔을 때

정 주고 떠난 것도 아닌데
웬일일까?
한 자락 멍멍한 가슴 속

어렴풋이 들리는 듯한 기적소리
또 누구 하나 떠나나 보다

지금은 새벽 3시,
그 사람은 어디쯤 눈을 뜬 채로 흘러가고 있을까
- 강영수, '새벽 3시'

▲두 번째 작품집 '고상혀도 마음은 보름달이랑께' 출간 자축연 장면. 사진 : 시인 문병란의 집

박노식 시인은 "회원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신산한 삶의 이면을 발견하게 되고 콧등이 시큰 해지는 먹먹함을 경험하기도 한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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